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종 대 별궁 (문단 편집) ==== 그 외 ==== * '''순어소(巡御所)''' 임금이(어) 움직일 때(순) 쓰는 장소(소). 궁궐보단 격이 낮다. 원 [[문공원]]의 사택. 의종이 비단 400근을 주고 샀다. * '''양제동 택(楊堤洞 宅)''' 의종이 양제동에 세운 관저. * '''경룡재(慶龍齋)''' 의종이 세운 관저. 나중에 더 크고 화려하게 지으며 인지재(仁智齋)로 이름을 바꾼다. 간관들이 제발 허물라고 부탁하자 의종은 자신이 꿈을 꿨는데 이런 시가 나왔다며 상서로운 조화이니 없앨 수 없다고 하자 결국 간관들도 포기한다. >탕탕(蕩蕩)한 춘광(春光)이 좋다, >흠흠(欣欣)한 물의(物意)가 새롭다. >인지덕(仁知德)을 수련하려 하니, >만년춘(萬年春)을 얻었구나! > >꿈 속에서 진길지(眞吉地)가 있다 들으니, >부소산(扶蘇山) 아래 별신선(別神仙)이로구나. >금조(今朝)의 새로움을 맞이하고 경사스러움을 받으니, >만복(萬福)이 오고 서기(瑞氣)가 이어 오는구나! * '''청녕재(淸寧齋)''' [[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63464|현화사]](玄化寺) 근처에 지었다고 한다. * '''중미정(衆美亭)''' 청녕재와 중미정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. 중미정은 정(丁) 자 모양의 정자인데 산 위에 있던 청녕재의 남쪽에 위치했다. 인공적으로 연못을 만들어 갈대를 채워 넣으니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. 의종은 아동을 시켜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역할을 시켜 분위기를 크게 돋구우며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. 1148년, 의종 21년에 이 정자를 지었는데 슬픈 일화가 고려사에 기록되있다. 정자를 짓던 노동자들은 자기 새참을 직접 챙겨 와야 했는데 한 노동자는 너무 가난해 새참을 챙기지도 못했고, 주변 사람들에게 얻어 먹었다. 어느날 그 노동자의 아내가 갑자기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 와 남편에게 주고 다른 사람들도 데려와 같이 먹으라 하였다. 자기 집 형편을 아는 노동자는 의아하고 당황해 이 먹을거리는 대체 뭔 돈으로 사온건지, 몸을 판건지 훔쳐온건지 물었다. 아내는 이 말을 듣고 "내 외모가 못생겼으니 누가 나와 잘 것이며 성격도 겁이 많으니 감히 훔쳐 올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? 다만 머리카락을 팔아 사왔다."라고 하며 두건을 벗고 머리를 보여줬다. 아내의 모습을 본 노동자는 슬픔이 북받쳐 울먹거리며 음식을 삼키지 못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도 모두 같이 슬퍼했다고 한다. [[분류:고려의 궁전]][[분류:북한의 없어진 건축물]][[분류:의종(고려)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